3·15 부정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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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 선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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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5대 부통령 선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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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5 부정선거는 1960년 3월 15일 부정 선거에 의해 실시된 대한민국 제5대 부통령 선거를 말한다.
후보
[편집]대통령 선거에는 이승만 자유당 후보와 조병옥 민주당 후보 등 2인만 입후보하였다. 그 외에도 출마를 시도한 정당 및 후보자가 있었으나, 자유당 측에서 공권력과 정치 깡패를 동원해 대대적인 입후보 방해를 자행해 모두 무산되었다.[1][2]
부통령 선거에는 이기붕 자유당 후보, 장면 민주당 후보 외에 김준연 통일당 후보, 임영신 대한여자국민당 후보도 입후보하여 4인의 후보가 나오게 되었다.
자유당
[편집]자유당은 이승만의 4선 당선을 노리는 한편, 86살 노인인 이승만 대통령의 서거 시 대통령에 취임하게 돼있는 부통령 자리를 다시 한 번 노리기 위해 이기붕 추대 공작도 병행하였다. 자유당은 1959년 6월 29일 이승만·이기붕 진용을 재구축하였고 서둘러 출마를 강행하였다.
그러나 김준연 통일당 부통령 후보, 임영신 대한여자국민당 부통령 후보 등이 대통령으로 이승만을 지지한다면서 부통령 선거전에 뛰어들어, 이승만 지지 표가 갈려서 패했던 4년 전 부통령 선거 때의 상황이 재현될지 모른다는 긴장감이 돌게 되었다.
자유당 제4대 대통령·제5대 부통령 후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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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후보 이승만 | 부통령 후보 이기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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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3대 대통령 제헌 국회의장 제헌 국회의원 | 제3대·제4대 전반기 민의원의장 제3대 국방부 장관 제3·4대 민의원의원 |
민주당
[편집]민주당은 지난 부통령 선거와 민의원의원 선거에서의 연이은 선전으로 자유당을 강력하게 위협하고 있었다. 그러나 민주당 내부에서는 신파와 구파 간의 갈등이 날이 갈수록 심화돼 후보 결정도 하게 어려운 상황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민주당은 1959년 11월 26일 정·부통령후보 지명대회를 열고 구파의 조병옥 박사를 대통령, 신파의 장면 박사를 부통령 후보로 선출하였다.
조병옥은 선거를 한 달가량 앞둔 1960년 2월 15일 지병으로 미국에서 요양하던 도중에 갑자기 사망하는 바람에 이승만은 단독후보가 되었다. 지난 대선 때 신익희가 유세 중 사망하였던 것에 이어 민주당은 두번째로 선거 운동 기간 동안 대선 후보를 잃게 되었다.
민주당 제4대 대통령·제5대 부통령 후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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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후보 조병옥 | 부통령 후보 장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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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대 내무부 장관 제3·4대 민의원의원 초대 경무부장 | 제4대 부통령 제2대 국무총리 초대 주미 대사 제헌 국회의원 |
통일당
[편집]통일당은 1959년 11월 17일 중앙위원회를 개최하고 이승만 대통령을 대통령 후보, 김준연 당 위원장을 부통령 후보에 각각 지명할 것을 결의하였다. 통일당은 1959년 11월 18일 대의원 515명 중 399명이 참석한 가운데 전당대회를 개최하고 이승만 대통령을 대통령 후보, 김준연 당 위원장을 부통령 후보로 지명하였다.[3]
출마 포기 후보
[편집]민족주의민주사회당
[편집]노농당은 1959년 12월 20일 대의원 420명 중 250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전당대회에서 당명을 민족주의민주사회당으로 개칭하고 전진한을 대통령, 이훈구를 부통령에 지명했다. 그러나 자유당의 공권력을 동원한 입후보 방해 공작 때문에 애를 먹었으며, 선관위가 당명 변경이 법적으로 하자가 있다며 민사당 당적자로서의 후보 등록을 받아주지 않는 등 어려움에 부딪힌 민사당은 결국 입후보를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반독재민주수호연맹
[편집]반독련은 1960년 2월 8일 각파 대표자 회의를 열고 장택상을 대통령, 박기출을 부통령에 지명했다. 그러나 후보 등록 서류를 3번이나 길거리에서 괴한들에게 빼앗기고, 깡패들이 장택상의 집안까지 침입해 협박을 하는 등 치열한 입후보 방해 공작이 벌어졌고, 장택상은 이에 본인의 입후보가 좌절될 시 야당의 조병옥 후보를 지원할 것이라며 여당에게 후보 등록 방해 공작을 중단할 것을 요구했다. 천신만고 끝에 두 후보는 후보 등록 마감일인 2월 13일 밤 후보 등록 서류를 제출했으나, 서류 미비를 이유로 각하되어 끝내 입후보에 실패하였다.
이후 이강학 당시 치안국장은 후보 등록 방해는 사실 장택상의 자작극이었다고 주장하였다. 이강학의 주장에 따르면 장택상은 반독련의 대선 후보로 확정된 후 이강학을 만나 사실 자신은 이승만 대통령과 맞서 싸우고 싶지 않은데 반독련이 와해 위기라 어쩔 수 없이 후보직을 수락했다며, 부디 자신의 후보 입후보를 방해해달라고 요청하였다고 한다.[4] 장택상은 이강학이 거짓말을 하는 것이라며 완강히 부정하였다.[5]
기타
[편집]서상일 민주혁신당 간사장은 민주혁신당 후보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려 했으나 민주혁신당의 정당 등록 불허 등을 이유로 1960년 1월 9일 입후보 포기를 선언하였다.[6]
김달호 전 진보당 부위원장은 무소속으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려 했으나 각종 입후보 방해 공작으로 인해 입후보를 할 수가 없다며 1960년 2월 13일 입후보 포기를 선언하였다.[7]
의사 한기도는 1960년 2월 13일 무소속 대통령 후보 등록 서류를 제출했음에도 법정 요건 미비를 사유로 등록이 거부되었다. 이후 자신이 유권자 추천서를 경찰에게 강탈 당하는 등의 입후보 방해를 당했다고 주장하였다.[8]
선거 운동 기간
[편집]부정 선거 계획
[편집]
선거를 앞두고 자유당은 불리한 조건에 놓여있었다. 전쟁 이후 미국의 무상 원조가 줄어 민생고가 심해진데다 부정부패가 만연하여 자유당은 국민들의 지지를 잃고 있었다. 게다가 두 차례에 걸친 무리한 개헌으로 인해 민주주의와 헌법을 파괴하는 당이라는 낙인이 찍혀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유당은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해 내무부 관료들과 이정재, 임화수 등 정치 폭력배들을 동원하여 부정 선거와 개표 조작을 계획하였다.
자유당은 전국의 공무원과 경찰 등 공권력은 물론 정치 깡패, 완장 부대까지 동원해 야당의 선거 운동을 방해하고 주민들에게 이승만과 이기붕을 지지하도록 압박하였다.[9][10] 자유당은 또한 야당 참관인들을 갖은 핑계로 투표장에서 끌어내었으며, 투표자들을 3인 1조로 투표하게 하고 투표지를 투표함에 넣기 전에 자유당 측 참관인에게 보여주도록 하는 공개 투표를 계획했다. 유권자들에게 투표 방법을 교육하는데 쓰겠다는 핑계로 가짜 투표용지를 만들어두었다가 투표함에 무더기로 투입하는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다.
이 모든 공작에는 경찰이 가담하고 있었다. 이에 야당과 몇몇 유권자들이 경찰이 수사는커녕 오히려 폭력을 조장하고 있다며 호소하였지만, 자유당은 정치 깡패들로 하여금 폭력 소동을 일으키게 해 이들을 탄압했다. 이런 상황 속에 3월 9일과 10일 전라남도 여수와 광산에서 각각 민주당 간부가 구타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고, 이를 계기로 민주당은 부정선거 거부 운동을 전개하였다.[11]
선거일
[편집]
선거일이 가까워지자 이들은 위에서 짠 계획들을 적용하기로 했다. 선거 전날인 3월 14일 자유당은 모든 선거함에 이승만과 이기붕이 찍혀 있는 위조 투표지를 무더기로 집어넣었다.
3월 15일 드디어 선거가 치러졌다. 이들은 투표하는 사람들에게 돈을 주는 가 하면, 한 명 당 투표 용지를 20장까지 가져가는 등의 선거 조작 행위를 저질렀다. 또한 자유당 당원들이 기표소까지 들어가 자유당을 뽑는 지 아니면 야당을 뽑는지 감시하는가 하면 야당 선거 관리인을 투표소에서 쫓아내는 행위까지 저질렀다.[12] 이러한 부정 행위에는 자유당 소속 정치깡패들이 동원되었고 그 밖에도 내무부 소속의 공무원들까지 조직적으로 개입하였다(이 일로 내무부의 차관급과 실국장급 간부들이 구속되었고, 내무부 장관 최인규는 사형을 선고받게 된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민주당은 오후 4시 30분에 언론에 담화를 발표하였으며, "3·15 선거는 선거가 아니라 선거의 이름 하에 이루어진 국민주권에 대한 포악한 강도 행위"라고 규정하고 불법, 무효임을 선언했다.[12] 이에 부정선거 사실이 알려지면서 그날 오후 늦게 각지에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가 발생하였다.
한편 선거가 종료된 뒤 개표를 시작했다. 그런데 개표 중 자유당 부통령 후보 이기붕의 득표율이 100%에 육박하는 결과가 나오자 국무위원들은 자유당 후보가 95% 또는 97%를 넘어 갈 것을 우려하였고, 이렇게 되면 부정선거임이 들통 날까봐 "걱정"을 하였다.[13] 그러자 최인규·이강학 등은 경비전화를 통해 "이승만은 80%로, 이기붕은 70~75% 선으로 조정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리하여, 각 지에서는 감표에 들어갔으나, 일부 지방에서는 최병환 내무부 지방국장이 50%선 조정을 지시해 혼란을 빚기도 하였다.[14] 하지만 이러한 혼란에도, 이기붕의 표는 79%로 하향 조정하게 되었다.[15]

선거 결과
[편집]대통령 선거
[편집]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 선거 | ||||||||
후보 | 정당 | 득표 | 득표율 | 당락 | 비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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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 자유당 | 9,633,376표 |
| 당선 | ||||
조병옥 | 민주당 | - | 사망 | |||||
합계 | 9,633,376표 | 무효표: 1,228,896표 |
부통령 선거
[편집]후보자별 득표율
대한민국 제5대 부통령 선거 | ||||||||
후보 | 정당 | 득표 | 득표율 | 당락 | 비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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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붕 | 자유당 | 8,337,059표 |
| 당선 | ||||
장면 | 민주당 | 1,843,758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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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연 | 통일당 | 249,095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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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신 | 대한여자국민당 | 97,533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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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계 | 10,527,445표 |
지역별 결과
[편집]대한민국 제5대 부통령 선거 | ||||||||
후보 | 정당 | 득표 | 득표율 | 당락 | 비고 | |||
---|---|---|---|---|---|---|---|---|
이기붕 | 자유당 | 509,693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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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 | 민주당 | 378,399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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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연 | 통일당 | 20,154표 |
| |||||
임영신 | 대한여자국민당 | 12,704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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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계 | 920,950표 |
대한민국 제5대 부통령 선거 | ||||||||
후보 | 정당 | 득표 | 득표율 | 당락 | 비고 | |||
---|---|---|---|---|---|---|---|---|
이기붕 | 자유당 | 955,804표 |
| |||||
장면 | 민주당 | 278,686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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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연 | 통일당 | 20,372표 |
| |||||
임영신 | 대한여자국민당 | 8,771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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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계 | 1,263,633표 |
대한민국 제5대 부통령 선거 | ||||||||
후보 | 정당 | 득표 | 득표율 | 당락 | 비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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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붕 | 자유당 | 437,883표 |
| |||||
장면 | 민주당 | 98,583표 |
| |||||
김준연 | 통일당 | 15,196표 |
| |||||
임영신 | 대한여자국민당 | 5,165표 |
| |||||
합계 | 556,827표 |
대한민국 제5대 부통령 선거 | ||||||||
후보 | 정당 | 득표 | 득표율 | 당락 | 비고 | |||
---|---|---|---|---|---|---|---|---|
이기붕 | 자유당 | 884,856표 |
| |||||
장면 | 민주당 | 140,567표 |
| |||||
김준연 | 통일당 | 12,488표 |
| |||||
임영신 | 대한여자국민당 | 6,327표 |
| |||||
합계 | 1,044,238표 |
대한민국 제5대 부통령 선거 | ||||||||
후보 | 정당 | 득표 | 득표율 | 당락 | 비고 | |||
---|---|---|---|---|---|---|---|---|
이기붕 | 자유당 | 851,878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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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 | 민주당 | 89,846표 |
| |||||
김준연 | 통일당 | 32,176표 |
| |||||
임영신 | 대한여자국민당 | 22,799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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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계 | 996,699표 |
대한민국 제5대 부통령 선거 | ||||||||
후보 | 정당 | 득표 | 득표율 | 당락 | 비고 | |||
---|---|---|---|---|---|---|---|---|
이기붕 | 자유당 | 1,218,247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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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 | 민주당 | 140,664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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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연 | 통일당 | 80,491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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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신 | 대한여자국민당 | 13,612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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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계 | 1,453,014표 |
대한민국 제5대 부통령 선거 | ||||||||
후보 | 정당 | 득표 | 득표율 | 당락 | 비고 | |||
---|---|---|---|---|---|---|---|---|
이기붕 | 자유당 | 1,166,341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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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 | 민주당 | 340,214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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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연 | 통일당 | 27,759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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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신 | 대한여자국민당 | 11,286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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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계 | 1,545,600표 |
대한민국 제5대 부통령 선거 | ||||||||
후보 | 정당 | 득표 | 득표율 | 당락 | 비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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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붕 | 자유당 | 1,398,637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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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 | 민주당 | 311,320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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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연 | 통일당 | 34,869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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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신 | 대한여자국민당 | 15,284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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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계 | 1,760,110표 |
대한민국 제5대 부통령 선거 | ||||||||
후보 | 정당 | 득표 | 득표율 | 당락 | 비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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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붕 | 자유당 | 786,595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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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 | 민주당 | 64,743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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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연 | 통일당 | 5,468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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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신 | 대한여자국민당 | 1,543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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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계 | 858,349표 |
대한민국 제5대 부통령 선거 | ||||||||
후보 | 정당 | 득표 | 득표율 | 당락 | 비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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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붕 | 자유당 | 127,125표 |
| |||||
장면 | 민주당 | 736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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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연 | 통일당 | 122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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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신 | 대한여자국민당 | 42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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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계 | 128,025표 |
재선거 결정
[편집]국회는 3월 18일 이승만과 이기붕을 각각 대통령과 부통령 당선자로 발표하였으나, 부통령 부정 선거에 대한 야권과 국민들의 반발이 거세지고, 고령의 이승만이 뒤늦게 사태를 파악하기 시작하였다. 다음은 당대의 기록이다.
4월 19일 마지막 국무회의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늘은 내가 이거 무슨 난중(亂中)에 앉아있는 것 같애. 사람들이 나를 나가라고 하는 모양인데 순순히 좋게 내주려고 해. 나는 무슨 이유인지, 무슨 까닭인지를 똑똑히 알았으면 해. 뭣인지 까닭을 알아야 해결할 것 아냐”
사태가 심각했지만 장관들은 여전히 대통령의 눈과 귀를 가리려고 했다. 홍진기 내무부 장관은 “마산 사태는 1차로 민주당이 선동했고 2차로 공산당이 조종한 듯하다”고 보고했다. 이런 식으로 공산당에게 잘못을 뒤집어씌운 잘못된 역사도 있었다.
4월 21일 뒤늦게야 사태를 파악한 이승만 대통령은 부정선거로 당선된 이기붕에게 사퇴요청하였다. 그리고 4월 23일 오전, 시위 중 부상당한 학생들이 입원해 있는 서울대병원을 방문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학생들이 왜 이렇게 되었어? 부정을 왜 해? 암, 부정을 보고 일어서지 않은 백성은 죽은 백성이지! 이 젊은 학생들은 참으로 장하다.”
이승만 대통령은 4월 26일 대국민 담화에서 제4대 대통령 선거 및 제5대 부통령 선거를 다시 치를 것을 밝혔다. 같은 날 국회에서도 정·부통령 선거를 다시 치를 것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이후 4월 26일 이승만은 자진 하야를 선언하며, 다음날인 27일 대통령 당선자인 이승만은 사퇴하고, 5월 3일 국회에서 사퇴서를 정식으로 수리하면서 제4대 대통령의 재선거가 확정됐으며, 같은 해 4월 28일에는 이기붕 부통령 당선자가 아들의 권총으로 살해되어 사망함으로써 제5대 부통령 역시 재선거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대법원에 제기돼있던 선거 무효 소송은 소송 대상이 둘 다 없어졌고 어차피 재선거가 확정된 터라 진행되지 않았다.
다음은 이승만 대통령 하야 선언 전문이다.
이러한 내용으로 이후의 사건이 진행된 것을 유추해 볼 수 있다.
나는 해방 후 본국에 들어와서 우리 여러 애국애족하는 동포들과 더불어 잘 지내왔으니 이제는 세상을 떠나도 한이 없으나, 나는 무엇이든지 국민이 원하는 것만 알면 민의를 따라서 하고자 하는 것이며 또 그렇게 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보고를 들으면 사랑하는 우리 청소년 학도들을 위시하여 우리 애국애족하는 동포들이 내게 몇 가지 결심을 요구하고 있다 하니 여기에 대해서 내가 아래 말하는 바를 할 것이며, 한 가지 내가 부탁하고자 하는 바는 이북에서 우리를 침략하려고 공산당이 호시탐탐하게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명심하고 그들에게 기회를 주지 말도록 힘써 주기를 바라는 바이다.
첫째는 국민이 원하면 대통령직을 사임할 것이며,
둘째는 지난 번 정·부통령 선거에 많은 부정이 있었다고 하니 선거를 다시 하도록 지시하였고,
셋째는 선거로 인연한 모든 불미스러운 것을 없애게 하기 위해서 이미 이기붕 의장이 공직에서 완전히 물러가겠다고 결정한 것이다.
넷째는 내가 이미 합의를 준 것이지만 만일 국민이 원하면 내각책임제 개헌을 할 것이다.
이상은 이번 사태를 당해서 내가 굳게 결심한 바이니 나의 이 뜻을 사랑하는 모든 동포들이 양해해 주어서 이제부터는 다 각각 자기들의 맡은 바를 행해 나가며 다시 질서를 회복시키도록 모든 사람이 다 힘써주기를, 내가 사랑하는 남녀 애국동포들에게 간곡히 부탁하는 바이다.
「이승만 대통령 하야 성명」(음성녹음), 1960년 4월 26일, 대통령기록관 기록컬렉션 연설기록
본래 대통령과 부통령의 재선거는 재선거 사유 확정 이후 40일 이내로 시행돼야 했으므로 제5대 부통령의 재선거는 6월 7일, 제4대 대통령의 재선거는 12일까지 실시돼야 했으나, 5월 2일 국회에서 개헌 뒤까지 정·부통령 재선거 보류가 만장일치로 결의되고 재선거 공고권자인 허정 대통령 권한대행이 국회의 의사를 존중할 것을 표명하면서 재선거는 치러지지 않았다. 내각제 개헌이 1960년 6월 15일 제2공화국 헌법으로서 시행되며 제1공화국의 부통령의 직위는 없어져 재선거를 치르지 않아도 되게 되었고, 내각제의 특성이 반영되어 대통령보다는 국무총리와 국회의 권한이 강화되었으며, 특히 국회의 동의 없이는 대통령이 자체적인 어떠한 행보도 불가하게 되는 헌법이 만들어지고, 이후 제2공화국의 헌법 하에 새로이 제4대 대통령 선거를, 헌법 제4호(1960년 6월15일 개정된 헌법, 대한민국 제 2 공화국 헌법) 제4조 대통령의 제 53, 54조에 의해 국회 내에 설치되는 양원합동회의에서 국회의원만의 선거로 당선되는, 국회 간접 선거로 실시해 윤보선이 당선되게 되었다.
즉, 4.19혁명에 의해 국회에 의해서만 돌아가는 통치가 자행되게 되어 삼권분립이 지켜지지 않았고, 국민의 직접선거가 간접선거로 바뀌어 국민들의 의사보다는 국회의원들에 의해 국가가 전부 운영되는 시대가 된 것이다.[16]
같이 보기
[편집]각주
[편집]- ↑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2019년 5월 5일에 확인함.
- ↑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2019년 5월 21일에 확인함.
- ↑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2020년 3월 26일에 확인함.
- ↑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2020년 3월 8일에 확인함.
- ↑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2020년 3월 8일에 확인함.
- ↑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2020년 3월 26일에 확인함.
- ↑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2020년 3월 26일에 확인함.
- ↑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2020년 3월 26일에 확인함.
- ↑ “야당계 자치단체장에 압력”. 《경향신문》. 1959년 1월 17일. 2019년 5월 20일에 확인함.
- ↑ 중앙선거관리위원회 1981, 743
- ↑ 한국혁명재판사편찬위원회편, 1962[1], 121쪽. 2차 출처 : 한국민주화운동사 1편 111p 인용
- ↑ 가 나 이에 민주당은~: 유숙란, 〈선거의 권위주의적 운용과 역기능〉, 한배호 편, 《한국현대정치론 I:제1공화국의 국가형성, 정치과정, 정책》(나남, 1990), 387쪽.
- ↑ 학민사 편집부 편, 1985,70~71쪽. 2차 출처 : 한국민주화운동사 1편 113p 인용
- ↑ 한국민주화운동사 1편 113p
- ↑ 한영우, 《다시 찾는 우리 역사 (전면 개정판)》(경세원, 2004), 590쪽. ISBN 89-8341-057-4
- ↑ 국가법률정보센터, https://www.law.go.kr/lsInfoP.do?lsiSeq=53084&ancYd=19600615&ancNo=00004&efYd=19600615&nwJoYnInfo=N&efGubun=Y&chrClsCd=010202&ancYnChk=0#0000 (1960년 06월 15일). “대한민국 제 2 공화국 헌법 (헌법 제 4호, 국가법률정보센터)”. 《대한민국 헌법 (제 4호)》. 2025년 03월 26일에 확인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