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제17대 대통령 선거 한나라당 후보 경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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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17대 대통령 선거 한나라당 후보 경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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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17대 대통령 선거 한나라당 후보 경선은 한나라당이 2007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당의 후보를 선출하기 의해 실시한 경선을 말한다. 경선 결과 이명박이 후보로 당선되었다.
일정
[편집]- 6월 11일 ~ 6월 13일 후보 등록 기간
- 6월 19일 정책 비전 대회
- 7월 20일 국민참여선거인단 명부 확정
- 7월 21일 ~ 8월 18일 후보자 합동 연설회 및 선거 운동
- 8월 19일 오전 6시 ~ 오후 8시 국민참여선거인단 대회 (투표)
- 8월 20일 한나라당 제9차 전당대회 (개표 및 대통령 후보자 지명)
후보자
[편집]한나라당의 이명박 전 서울시장은 재임 시절 이룬 버스체계 개편과 청계천 복원 사업 등으로 중도층의 호감을 얻고 있었다. 그러나 당내에서는 오히려 2년간 대표를 지내며 확고한 당내 기반을 구축하고 있던 박근혜 전 대표가 세를 과시하고 있었다. 이에 당에서는 둘의 화합을 중재하려 했으나, 양쪽 다 만족하는 경선 룰은 생각보다 쉽게 정할 수 없었다. 이명박 후보 측은 당의 결정에 따른다는 입장이었는데, 이 경우 자신에게 유리하게 국민 참여폭을 늘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반면 박근혜 후보 측은 ‘원칙’을 내세우며 룰 변경을 거부했다.
3월 18일 결정된 경선룰에 따르면 선거인단이 4만 명에서 20만명으로 (일반선거인단은 1만 2천 명에서 6만 명으로) 늘었고, 전당대회는 6월에서 8월로 연기되었다. 오픈프라이머리를 요구하던 손학규 전 경기지사는 이같은 경선룰에 반발해 얼마 안가 탈당했으며, 이후 대통합민주신당 경선에 참여하였다.
6월 13일 후보 등록이 완료되었다. 이명박 전 서울시장, 박근혜 전 대표, 원희룡 전 최고위원, 홍준표 의원, 고진화 의원 등이 후보로 등록하였다. 그 중 고진화 후보는 7월 20일 사퇴한다.
여권에선 고건 전 총리가 대선 불출마를 선언하며 마땅히 지지율 높은 대선 후보도 없었고, 범여권 정당의 지지율도 떨어지며 한땐 한나라당 지지율이 50%를 상회할 정도였기 때문에 한나라당 경선은 곧 본선으로 여겨졌고, 달아오른 경선 과정에서 이명박 후보 측에는 BBK 문제, 박근혜 후보 측에는 정수장학회 문제 등이 붉어져나왔다.[1] 사실 이때 훗날 대통령 탄핵 사태까지 이어지는 최순실 일가 문제도 거론되었으나, 이땐 다른 문제들이 더 부각되며 묻힌 바 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좀 더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 있다고 평가받던 이명박 후보측의 문제가 더 부각되어, 친인척 관여 부동산 투기 의혹, 부인의 15차례 위장전입 의혹, BBK 관련 주가조자 의혹, X파일 존재론, 산악회 선거법 위반 논란, 도곡동 땅 문제 등이 붉어지며 이명박 후보의 지지율을 조금씩 끌어내렸다. 이 상황에서 타 후보들은 1985년 이명박 후보의 처남과 형 이상은 씨가 도곡동 일대의 땅을 잔뜩 매입한 후 지하철 개통으로 차익을 엄청 남기고 1995년 포스코에 되판 사건을 문제 삼았다.
전당대회를 6일 전인 8월 14일 검찰은 형 이상은 씨의 몫 일부가 이명박 후보의 차명계좌라는 중간수사발표가 하면서 이명박 사퇴론이 거세졌다. 그러나 다음날 대검찰청 정동기 차장이 곧바로 “도곡동 땅은 이명박 후보 소유라는 증거가 없다.”라는 말을 던지며 가까스로 수습한다.[2]
기호 | 이름 | 생년 | 경력 | 비고 |
---|---|---|---|---|
1 | 이명박 | 1941년 | 제32대 서울특별시장 제14·15대 국회의원 | |
2 | 원희룡 | 1964년 | 제16·17대 국회의원 | |
3 | 박근혜 | 1952년 | 前 한나라당 대표 제15·16·17대 국회의원 | |
4 | 홍준표 | 1954년 | 제15·16·17·18대 국회의원 | |
5 | 고진화 | 1963년 | 제17대 국회의원 | 후보 사퇴 |
여론조사
[편집]날짜 | 이명박 | 원희룡 | 박근혜 | 홍준표 | 고진화 | 주 | 비고 |
---|---|---|---|---|---|---|---|
5월 16일 | ![]() ![]() ![]() ![]() ![]() | 0.1 | ![]() ![]() ![]() ![]() | - | - | [3] | |
5월 26일 | ![]() ![]() ![]() ![]() ![]() | 0.1 | ![]() ![]() ![]() | 0.1 | - | [4] | |
6월 9일 | ![]() ![]() ![]() | 0.4 | ![]() ![]() ![]() | 0.1 | - | [5] | |
6월 21일 | ![]() ![]() ![]() | - | ![]() ![]() ![]() ![]() | - | - | [6] | |
7월 1일 | ![]() ![]() ![]() ![]() | 0.3 | ![]() ![]() ![]() ![]() | ![]() | 0.1 | [7] | |
7월 14일 | ![]() ![]() | ![]() | ![]() ![]() ![]() ![]() | - | - | [8] | |
7월 20일 | 고진화 후보 사퇴 | ||||||
7월 21일 | ![]() ![]() ![]() ![]() | 0.1 | ![]() ![]() ![]() ![]() | 0.2 | ─ | [9] | |
7월 30일 | ![]() ![]() ![]() ![]() | - | ![]() ![]() ![]() ![]() ![]() | 0.2 | ─ | [10] |
이명박·박근혜 후보 지지율 추이
[편집]날짜 | 이명박 | 박근혜 | 비고[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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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 |||
8월 12일 | ![]() ![]() ![]() ![]() | ![]() ![]() ![]() | |
9월 13일 | ![]() ![]() ![]() | ![]() ![]() ![]() ![]() | |
10월 11일 | ![]() | ![]() ![]() ![]() | |
11월 15일 | ![]() ![]() ![]() ![]() ![]() | ![]() ![]() ![]() ![]() | |
12월 26 ~ 27일 | ![]() ![]() ![]() ![]() | ![]() ![]() ![]() | |
2007년 | |||
2월 3일 | ![]() ![]() ![]() ![]() | ![]() ![]() ![]() | |
2월 24일 | ![]() ![]() ![]() ![]() ![]() | ![]() ![]() ![]() ![]() | |
3월 26 ~ 27일 | ![]() ![]() ![]() | ![]() ![]() ![]() ![]() | |
4월 21일 | ![]() ![]() ![]() ![]() | ![]() ![]() ![]() | |
5월 12일 | ![]() ![]() ![]() ![]() | ![]() ![]() ![]() ![]() | |
6월 16일 | ![]() ![]() | ![]() ![]() ![]() | |
7월 7일 | ![]() ![]() ![]() | ![]() ![]() ![]() ![]() | |
7월 21일 | ![]() ![]() ![]() ![]() | ![]() ![]() ![]() ![]() |
선거 방법
[편집]- 국민참여선거인단(80%)
- 가장 최근에 실시된 전국 단위 공직 선거 유권자 수의 0.5% 이상으로 구성.
- 전당대회 대의원 45,717명 (25%, 전체 비율 대비 20%)
- 당원 선거인 69,496명 (37.5%, 전체 비율 대비 30%)
- 일반 국민 69,496명 (37.5%, 전체 비율 대비 30%)
- 여론 조사(20%)
- 공인된 복수의 대한민국 조사기관에서 실시.
- 여론조사 1개당 6표로 환산.
진행 경과
[편집]후보 등록 이전
[편집]후보 등록 이후
[편집]한나라당 경선관리위원회는 7월 22일에 제주에서 시작된 후보자 합동연설회가 과열 조짐을 보임에 따라, 7월 24일로 예정된 광주·전남 합동연설회를 비롯한 전체 합동연설회 일정을 잠정 중단하였다[12]. 그러나 7월 26일로 예정된 부산 합동연설회부터는 재개하기로 결정하고, 광주·전남 합동연설회는 8월 5일로 연기한다고 발표했다.
선거 결과
[편집]순위 | 기호 | 이름 | 여론조사 | 선거인단 | 총 득표 | 비고 |
---|---|---|---|---|---|---|
득표율 | 득표율 | 득표율 | ||||
1 | 1 | 이명박 | 16,868 | 64,216 | 81,084 | 후보 확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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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3 | 박근혜 | 13,986 | 64,648 | 78,63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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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2 | 원희룡 | 1,079 | 1,319 | 2,39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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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 4 | 홍준표 | 793 | 710 | 1,50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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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 | 고진화 | - | - | - | 후보 사퇴 |
합계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지역별 결과
[편집]이명박 후보는 선거인단 투표 결과 서울과 경기, 호남을 제외한 모든 지역에서 박근혜 후보에게 패했으나, 여론조사에서 압승하여 경선에서 이길 수 있었다. 선거인단 185,080명 중 131,086명이 투표해 최종 70.83%의 투표율을 기록했다.
이명박 | 원희룡 | 박근혜 | 홍준표 | 합 계 | |
---|---|---|---|---|---|
서울 | 16,190 | 330 | 11,113 | 271 | 27,904 |
58.0% | 1.2% | 39.8% | 1.0% | 100% | |
부산 | 5,273 | 60 | 5,789 | 47 | 11,169 |
47.2% | 0.5% | 51.8% | 0.4% | 100% | |
대구 | 2,305 | 19 | 5,072 | 22 | 7,418 |
31.1% | 0.3% | 68.4% | 0.3% | 100% | |
인천 | 3,089 | 36 | 3,135 | 25 | 6,285 |
49.1% | 0.6% | 49.9% | 0.4% | 100% | |
광주 | 1,338 | 104 | 853 | 26 | 2,321 |
57.6% | 4.5% | 36.8% | 1.1% | 100% | |
대전 | 1,272 | 40 | 2,404 | 18 | 3,734 |
34.1% | 1.1% | 64.4% | 0.5% | 100% | |
울산 | 1,517 | 18 | 1,637 | 11 | 3,183 |
47.7% | 0.6% | 51.4% | 0.3% | 100% | |
경기 | 12,779 | 161 | 12,543 | 88 | 25,571 |
50.0% | 0.6% | 49.1% | 0.3% | 100% | |
강원 | 1,866 | 22 | 2,436 | 14 | 4,338 |
43.0% | 0.5% | 56.2% | 0.3% | 100% | |
충북 | 1,823 | 26 | 2,343 | 16 | 4,208 |
43.3% | 0.6% | 55.7% | 0.4% | 100% | |
충남 | 2,271 | 26 | 3,179 | 24 | 5,500 |
41.3% | 0.5% | 57.8% | 0.4% | 100% | |
전북 | 2,141 | 111 | 1,581 | 39 | 3,872 |
55.3% | 2.9% | 40.8% | 1.0% | 100% | |
전남 | 2,692 | 133 | 1,852 | 48 | 4,725 |
57.0% | 2.8% | 39.2% | 1.0% | 100% | |
경북 | 4,455 | 31 | 5,111 | 24 | 9,621 |
46.3% | 0.3% | 53.1% | 0.2% | 100% | |
경남 | 4,498 | 76 | 4,748 | 30 | 9,352 |
48.1% | 0.8% | 50.8% | 0.3% | 100% | |
제주 | 707 | 126 | 852 | 7 | 1,692 |
41.8% | 7.4% | 50.4% | 0.4% | 100% | |
여론조사 | 16,868 | 1,079 | 13,984 | 793 | 32,724 |
51.5% | 3.3% | 42.7% | 2.4% | 100% | |
총합 | 81,084 | 2,398 | 78,632 | 1,503 | 163,617 |
49.6% | 1.5% | 48.1% | 0.9% | 100% |


각주
[편집]- ↑ 김영석 기자 (2007년 6월 3일). “李→ 朴 정수장학회 문제 거론, 朴→ 李 재산형성 과정 이슈화”. 《국민일보》. 2014년 10월 25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7년 6월 4일에 확인함.
- ↑ 류정민 기자 (2011년 1월 12일). “MB와 정동기, 그리고 베일의 도곡동사건”. 《미디어오늘》. 2011년 1월 12일에 확인함.
- ↑ 李, 소폭 상승(48.9%)- 朴, 변화 없어(22.4%) 보관됨 2007-09-27 - 웨이백 머신, 문화일보-한국사회여론연구소, 5월 17일.
- ↑ 이 47%, 박 23%… 대선구도 8개월째 변화없어, 조선일보-한국리서치, 5월 28일.
- ↑ 이·박 충청서 박빙… 영·호남선 이(李)가 10~12%P 앞서, 조선일보-한국갤럽, 6월 11일.
- ↑ 李·朴 지지율差 11%P로 줄어 보관됨 2007-09-27 - 웨이백 머신, 문화일보-한국사회여론연구소, 2007년 6월 17일.
- ↑ 이·박, 충청·영남서 접전… 수도권선 이 44·박 25%, 조선일보-한국갤럽, 2007년 7월 2일.
- ↑ 이·박 격차, 남성에선 22%P… 여성에선 6.7%P 보관됨 2007-07-17 - 웨이백 머신, 조선일보-한국리서치, 2007년 7월 16일.
- ↑ 이명박 37.2% 박근혜 27.6%, 조선일보-한국갤럽, 2007년 7월 23일.
- ↑ 이, 20대 남성… 박은 50대이상 여성서 지지율 최고, 조선일보-TNS코리아, 2007년 7월 30일.
- ↑ 각종 의혹에도 35%대 버티는 ‘이명박 지지율’…이유는?, 한겨레-리서치플러스, 2007년 7월 25일.
- ↑ 한나라 “경선과열” 합동유세 잠정 중단, 동아일보 2007년 7월 2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