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스토피오렌티노
세스토피오렌티노 Sesto Fiorentino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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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 | |
국가 | ![]() |
지역 | 토스카나주 |
행정 구역 | 피렌체현 |
지리 | |
면적 | 49 km2 |
해발 | 55 m |
시간대 | CET (UTC+1) CEST (UTC+2) |
인문 | |
인구 | 49,085명(2007년) |
인구 밀도 | 1,000명/km2 |
상징 | |
수호성인 | 투르의 마르티노(축일 11월 11일) |
지역 부호 | |
우편번호 | 50019 |
지역번호 | 055 |
웹사이트 | 세스토피오렌티노 ![]() |
세스토피오렌티노(이탈리아어: Sesto Fiorentino)는 이탈리아 토스카나주 피렌체현에 있는 코무네다.
역사
[편집]이 지역에 인류 정착의 가장 오래된 시기는 중석기 시대(대략 9,000년 전)이다. 에트루리아의 존재는 기원전 7세기 이후로 알려졌지만, 도시는 Sextus ab urbe lapis(도시의 마일스톤에서 6 마일)이라는 이름으로 로마인들이 건설했다. 최초의 교회들은 산 마르티노 피에베와 함께 초기 중세 시대에 지어졌다. 세스토피오렌티노는 피렌체 대교구의 대상이였다. 후에 피렌체 공화국의 지배하에 들어가면서, 르네상스시대부터 경제 발전이 이뤄졌다.
1735년 카를로 지노리 백작은 유럽 최초의 자기 공단 중 하나인 마니파투라 디 도차를 세웠다. 현재는 리처드-지노리라는 이름으로, 회사는 여전히 세스토에 위치해 있으며, 이탈리아에서 가장 큰 자기 생산지이다. 19세기가 끝나갈 무렵, 리처드-지노리에서 훈련을 받은 장인들이 개인 도자기 작업장을 시작하였고, 그중 일부는 공장으로 성장하였다. 현재까지 세스토피오렌티노에는 백 명이 넘는 제작자들이 존재하며, L'Istituto Statale d'Arte 라고 불리는 도자기 제작법을 가르치는 국립학교도 있다.[1][2]
세스토피오렌티노는 1860년 국민투표를 통해 이탈리아 왕국에 합병되었다. 도시는 19세기 후반 노동자 분쟁의 중심지 중 한 곳이였고, 1897년 이탈리아 의회의 두 번째 사회주의자인 주세페 페세티가 선출되기도 하였다. 1899년 토스카나 지역 최초의 사회주의자 시장이 있는 도시가 되었다.
자매 도시
[편집]각주
[편집]- ↑ “Ceramica Toscana.it, The ceramics tradition in Sesto Fiorentino”. 2011년 7월 22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9년 3월 11일에 확인함.
- ↑ “Ceramica Toscana.it, L'Istituto Statale d'Arte”. 2009년 4월 17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9년 3월 11일에 확인함.
- ↑ “Wieliczka Miasta partnerskie” [Polish]. 《Urząd Miasta i Gminy Wieliczka》. 2013년 6월 25일에 확인함.
- ↑ www.arso.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