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녕 망우당 곽재우 유허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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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목 | 문화재자료 (구)제23호 (1983년 7월 20일 지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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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량 | 1,219m2 |
위치 | |
주소 | 경상남도 창녕군 도천면 우강리 931번지 |
좌표 | 북위 35° 24′ 6″ 동경 128° 30′ 49″ / 북위 35.40167° 동경 128.51361° |
정보 |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정보 |
창녕 망우당 곽재우 유허비(昌寧 忘憂堂 郭再祐 遺墟碑)는 대한민국 경상남도 창녕군 도천면 우강리에 있는 비석이다.
1983년 7월 20일 경상남도의 문화재자료 제23호 충익공망우당곽재우유허비로 지정되었다가, 2018년 12월 20일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되었다.[1]
개요
[편집]유허비는 옛 선현의 자취를 살피어 후세에 전하고 그를 기리고자 세워두는 것으로, 이 비는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인 곽재우의 공적을 기리고 있다.
곽재우(1552∼1617)는 호가 망우당이며 선조 18년(1585) 34세의 나이에 별시에 뽑혔으나 지은 글이 왕의 뜻에 거슬린다 하여 무효가 되자, 일찌감치 과거에 나갈 뜻을 포기하였다. 그러던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 관군이 크게 패하자 의령 등지에서 의병을 일으켜 관군을 대신하여 적과 싸웠다. 그 공으로 유곡찰방에 임명된 후 여러 관직을 거쳤으나 곧 벼슬을 버리고 현풍으로 돌아갔다. 정유재란 때에는 밀양, 영산, 창녕, 현풍의 네 고을에서 의병을 일으켜 화왕산성을 지키며 적의 접근을 막아내기도 하였다가, 계모 허씨가 사망하자 성을 나와 장례를 마친 뒤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나라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았다. 광해군 2년(1610) 왕의 간청으로 다시 서울로 올라가 일을 맡아보았으나 곧 병을 이유로 고향으로 돌아왔으며, 광해군 9년(1617)에 생을 마치었다. 그 후 ‘충익’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망우정 뒷편에 서 있는 비는 의병을 일으켰던 공의 뜻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이 고을의 유림들이 세워놓은 것으로, 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운 간결한 구조에 비 윗변의 양끝을 비스듬히 다듬은 모습이다.
같이 보기
[편집]각주
[편집]- ↑ 경상남도 고시 제2018-485호,《경상남도 지정문화재(문화재자료) 명칭변경 고시》, 경상남도지사, 2018-12-20
참고 자료
[편집]- 충익공망우당곽재우유허비 -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