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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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딩 가드 | ||||
개인 정보 | ||||
국적 | 일제강점기 조선 | |||
선수 경력 | ||||
고등학교 | 경신학교 (중학교)[1][2] | |||
대학교 | 보성전문학교[3] | |||
클럽 | 조선 농구단 |
송기우(한국 한자: 宋基宇)는 일제강점기 때의 농구인 겸 축구 선수 및 야구 선수, 럭비 선수[4]였다.
야구 선수로는 유격수로,[5]축구 선수로는 골키퍼로 활약했으며[2] 1933년에 창단된 경성 축구단의 창립 맴버로 활약했다. 여러 스포츠를 겸했지만 그 중 농구 선수로서의 활약이 제일 활발하였으며 1927년에는 농구연맹전의 심판진을 맡기도 하였다.[6]이후 1932년 당시 신문에서는 송기우 선수를 노련하기 조선 농구계 일인자로 표현했으며[7]그해에 농구남자일반에서 우승을 이끈 동시에[8] 조선 농구단에서도 활약했다.[9]주로 보성전문학교 농구부에서 주장직을 맡으며 여러 대회에서 우승을 이끈 송기우 선수는 1934년 일본장기고상농구부의 코치로 부임했고 당시 기사에서는 보전농구부가 사계에 군림한 이라 동부주장 중임을 질미지고 상해 또는 동경 원정시에 그 신기를 발휘하든 이라고 보도하며 송기우 선수를 평가했다. 또한 한국 농구 코치 중에서는 일본(일본 본토)으로 초빙 받은 최초의 인물이였다.[10]그 외에도 조선축구협회 임원[11], 경성 럭비단 선수,[12] 조선농구협회 회계감사위원[13], 조선농구협회가 주최하는 조선농구연맹전의 심판위원,[14]숙명여자고등학교 농구부 코치[15] 등 일제강점기 시절 체육계의 여러 분야에서 활발히 활동한 인물이다.
기타
[편집]1935년 12월 16일 오후 1시에 견지동시천교당에서 염정희(廉貞姬)양과 결혼식을 가졌다.[16]
각주
[편집]- ↑ 당시 중학교는 지금의 중학교와 다르게 연령대가 높았다.
- ↑ 가 나 “개막된 축구 연장 또 연장”. 동아일보. 1927년 11월 3일.
- ↑ “양도인기선양한 경평대항전은 명일”. 조선일보. 1930년 11월 28일.
- ↑ “조선신경대회 보전럭비 우승 28-0 고공배”. 동아일보. 1931년 10월 14일.
- ↑ “사구락부야구연맹전기전 삼”. 동아일보. 1926년 8월 16일.
- ↑ “미구종료 농구연맹전적”. 조선일보. 1927년 12월 4일.
- ↑ “전조선중등 전문 농구선수권평”. 동아일보. 1932년 10월 5일.
- ↑ “농구남자일반 접전 연전우승”. 동아일보. 1932년 10월 20일.
- ↑ “조선농구단 진용”. 조선일보. 1932년 4월 10일.
- ↑ “송기우군을 농구 코취로”. 조선일보. 1934년 5월 12일.
- ↑ “축협의 사업계획”. 동아일보. 1936년 5월 29일.
- ↑ “경성 럭비단”. 조선일보. 1935년 11월 2일.
- ↑ “올림픽 선수 낸 학원 찾어”. 조선일보. 1937년 5월 18일.
- ↑ “농구연맹전위원”. 조선일보. 1937년 5월 6일.
- ↑ “숙명여고농구 삼일에 발정”. 동아일보. 1937년 12월 23일.
- ↑ “운동계인사”. 조선일보. 1935-1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