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 송국리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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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목 | 사적 (구)제249호 (1976년 12월 31일 지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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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적 | 546,908m2 |
시대 | 선사시대 |
위치 | |
주소 | 충청남도 부여군 초촌면 송국리 산24-1번지 |
좌표 | 북위 36° 16′ 0″ 동경 127° 2′ 3″ / 북위 36.26667° 동경 127.03417° |
정보 |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정보 |
부여 송국리 유적(扶餘 松菊里 遺蹟)은 대한민국 충청남도 부여군 초촌면 송국리에 있는 청동기시대 집터 유적이다. 1976년 12월 31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249호로 지정되었다. 하천과 평지에 인접한 낮은 구릉과 대지 위에 100여 기 이상의 집터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유구
[편집]청동기시대 대지조성을 위해 대략 1,000㎡에 걸쳐 성토하였다. 성토층에서는 지점에 따라 다양한 재질의 흙이 사용되었으며, 평탄하게 하기 위해 경사면 위쪽의 풍화암반층을 깎아내고 그 깎아낸 흙은 경사면에 쌓아 면적을 넓힌 것으로 보인다.[1]
제의 통로로 추정되는 대형 나무기둥열도 발견되었다. 확인된 나무기둥열은 두 줄이 쌍을 이루며 약 200m에 걸쳐 길게 나 있는데, 모두 북쪽에 위치한 1호 석관묘를 향하고 있었다. 석관묘에서는 비파형 동검, 동착, 관옥 등 권위를 상징하는 유물들이 함께 발견되어 마을의 지배자가 묻힌 것으로 추정되면서 이들 나무기둥열은 무덤군으로 향하는 제의를 위한 통로시설로 활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1]
대지 조성과정에서 만들어진 도랑 모양의 구상유구(溝狀遺構) 7기도 확인되었는데, 안은 회색과 적색 등의 점토덩어리(토괴, 土塊)로 무질서하게 메워져 있었다.[1]
집터는 평면 형태에 따라 둥근 것과 긴 네모꼴인 것이 있다. 둥근 집터는 30∼150cm 깊이로 땅을 파서(수혈식주거지) 만들었으며, 한쪽 벽을 얕게 파서 문을 만든 듯하다. 화덕자리가 발견되지는 않았지만 다수의 저장용 구덩이가 발견되었다. 바닥 중앙에 1m 내외의 긴 타원형 구덩이를 파고 그 구덩이 안에 몇 개의 둥근 구덩이를 만들었다.
네모꼴 집터는 30cm 미만으로 땅을 판 반움집이나 지상식에 가까운 것으로 기둥구멍이 발견되지 않았으나, 주춧돌이 있는 발달된 집 형태를 하고 있다.
유물
[편집]집터 안에서는 토기와 석기가 많이 출토되었다. 토기는 무문토기와 붉은 토기(홍도), 검은 간토기(흑도)가 나왔다. 무문토기는 납작한 밑, 긴 달걀형의 몸체, 목이 없이 아가리가 밖으로 약간 꺾인 모습을 하여 이전의 무문토기와 달라 송국리식토기라 불린다.
돌칼, 돌화살촉, 방추차, 돌도끼를 비롯하여 다양한 석기들도 출토되었다. 그 밖에 많은 양의 불탄쌀과 벽체에 세웠던 판자가 불탄채로 나오기도 하였고, 청동도끼 거푸집(동부용범)이 출토되었다. 청동도끼 거푸집은 부채날형 청동도끼의 틀로서 요령지역의 것과 닮은 것이다. 집터 서쪽에는 한국에서 처음으로 무문토기 가마터가 확인되었다.
시대
[편집]송국리 집터는 유물을 토대로 기원전 9∼6세기 전에 농경과 수렵에 기반을 둔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되며, 청동기시대 사람들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2]
현재 5기의 집터가 움집 형태로 복구되었다.
같이 보기
[편집]각주
[편집]- ↑ 가 나 다 국가유산청 (2024년 12월 12일). “부여 송국리 유적에서 청동기시대 대규모 성토층 확인”.
- ↑ https://www.khan.co.kr/article/202501300500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