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인프랑켄 대관구
마인프랑켄 대관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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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 독일의 대관구 | |||||||||
1933년~1945년 | |||||||||
![]() 1944년의 나치 독일 대관구 지도. | |||||||||
수도 | 뷔르츠부르크 | ||||||||
인구 | |||||||||
• 1939년 5월 17일[1] | 844,732 | ||||||||
정부 | |||||||||
대관구지휘자 | |||||||||
• 1933–1945 | 오토 헬무트 | ||||||||
역사 | |||||||||
• 수립 | 1월 30일 1933년 | ||||||||
• 해체 | 5월 8일 1945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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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국가 | ![]() |
마인프랑켄 대관구(독일어: Gau Mainfranken) 또는 1935년까지 불렸던 명칭인 운터프랑켄 대관구(독일어: Gau Unterfranken), 저프랑코니아 대관구는 1933년부터 1945년까지 독일 바이에른 주 운터프랑켄 현에 있던 나치 독일의 대관구이다. 그 이전인 1926년부터 1933년까지는 나치당의 지역당 조직중 하나로 있었다.
역사
[편집]원래 나치의 대관구(Gau) 조직은 1926년 5월 22일 나치당 회의에서 지역당 조직 구조 개선을 목적으로 창립한 구역이었다. 이후 1933년 나치가 독일의 권력을 장악하면서 독일의 주 단위 행정구역이 당의 대관구 행정구역으로 대체되었다.[2]
각 대관구를 지휘하는 대관구지휘자는 점점 더 권력이 세지면서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외부에서 거의 간섭을 받지 않았다. 지역 대관구지휘자는 정당 행정 뿐 아니라 정부 직책에도 관여하여 선전 감시 등 다양한 작전을 수행했으며, 1944년 9월 이후에는 국민돌격대 소집과 각 대관구 방어작전 역할도 맡았다.[2][3]
마인프랑켄 대관구의 대관구지휘자는 대관구 수립부터 해체까지 오토 헬무트 한명이였으며, 그의 부관으로 루트비히 푀젤(1931-1937년), 빌헬름 퀴흔라이히(1937-1945년)이 있었다.[4][5]
각주
[편집]- ↑ Bayrisches Landesamt für Statistik, accessed 26 June 2008.
- ↑ 가 나 “Die NS-Gaue” [The Nazi Gaue]. 《dhm.de》 (독일어). Deutsches Historisches Museum. 2017년 1월 9일에 확인함.
- ↑ “The Organization of the Nazi Party & State”. 《nizkor.org》. The Nizkor Project. 2016년 11월 9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7년 1월 9일에 확인함.
- ↑ “Gau Mainfranken”. 《verwaltungsgeschichte.de》 (독일어). 2017년 4월 27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7년 2월 18일에 확인함.
- ↑ “Übersicht der NSDAP-Gaue, der Gauleiter und der Stellvertretenden Gauleiter zwischen 1933 und 1945” [Overview of Nazi Gaue, the Gauleiter and assistant Gauleiter from 1933 to 1945]. 《zukunft-braucht-erinnerung.de》 (독일어). Zukunft braucht Erinnerung. 2017년 5월 26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7년 2월 18일에 확인함.